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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한국인의 삶을 바꾼 것들] 농기구의 급속한 발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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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05-05-30 | 조회수 | 2892 |
<P> <BR> <FONT color=#ff80c0 size=3>손에 쥐고 김매던 호미는 원격조정 무인 농기계로 대체 <BR></FONT> <BR>농기구 변천사는 지난 60년동안 높아진 우리 삶의 질을 압축해 보여주는 한 상징이다. 사람의 손발로 하던 농사를 지금은 거의 대부분 기계가 대신하고 있다. 나아가 집이나 사무실에서 시골의 논밭을 보면서 원격제어할 수 있는 차세대 영농시스템도 개발돼 올해 선보였다. <BR> <BR> 조선 말기까지 우리나라의 농기구 발전은 정체를 면할 수 없었다. 써레·곰방메·쟁기·번지·호미·낫 등 인력과 축력을 사용하는 재래 농기구의 생산력은 보잘 것 없었다. 조선 후기 농업의 발전은 도구의 개량에 의한 것이라기보다 농법의 발전에 힘입은 측면이 강했다. 근대식 농기구의 최초 보급은 1909년 이뤄졌다. 일본에서 탈곡기 등 6종의 개량 농기구를 수입해 공급한 것이 기록으로 남아 있다. </P><P> </P><P>해방 직후 농기구의 ‘몰골’은 더욱 열악했다. 일본인이 운영하던 ‘적산 공장’의 일부에서 농기구를 생산했으나 기술과 재료 부족으로 그 질은 형편없이 낮았다. 본질적으로는 조선시대의 농기구가 거의 그대로 사용됐다고도 할 수 있었고, 농기구 발전에 의한 농업 생산력 증대는 기대하기 힘들었다. 1952년까지는 호미·쟁기·낫·삽 등 재래 농기구가 생산됐을 뿐이다. 1953년 양수기와 발동기, 1954년에는 제승기, 1955년부터는 인력 탈곡기와 동력 탈곡기가 생산되기 시작했으나 그 보급률은 미미했다. </P><P> </P><P>1960년대 초 군사정권이 내세운 농업정책의 모토는 ‘주곡 자급을 위한 식량 증산’이었다. 농업 기계화는 식량 증산을 위한 전제조건이었다. 가뭄 피해를 막기 위한 동력 양수기, 병충해 방제를 위한 동력 방제기, 심경다비 등 지력 증진을 위한 경운기 등을 정부 보조금을 지원해 농가에 공급했다. </P><P> </P><P>1961년부터 보급된 동력 농기계는 대부분 일제이거나 일본 기업과 기술제휴를 통해 생산한 제품이었다. 당시 5마력급 석유 엔진을 부착한 양수기가 일본에서 수입됐다. 국산 동력 경운기는 대동공업이 1962년 일본 미쓰비시와 기술제휴해 이듬해 처음으로 3,096대를 생산·보급한 것이 그 효시다. 병충해 방제를 위한 동력 분무기는 공랭 2사이클 엔진이 부착되었는데, 이 역시 1963년 일본에서 들여왔다. 일부나마 국산화가 시작된 것은 1965년 4,000rpm짜리 분무기를 생산하면서부터다. </P><P> </P><P>1960년대까지의 한국 농업은 여전히 인력과 축력을 이용한 ‘전근대적’ 농법이 주류를 이뤘다. 축력을 동력으로 바꾼 계기는 1972년부터 시작된 농업 기계화 5개년계획이다. 1971년 1월 농림부를 초도 순시한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농기계공장을 계열화해 농기계 국산화를 조기에 달성할 수 있도록 적극 지원하는 대책을 상공부와 함께 수립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P><P><BR><FONT color=#ff80c0>무농약 친환경 멀칭 이앙기까지 등장 </FONT></P><P><BR>농업 기계화 5개년계획의 핵심은 동력 경운기를 벼농사 분야에 획기적으로 적용하는 것이었다. 1973년 박 대통령은 국민투자기금 300억 원을 재원으로 1974년부터 1976년까지 동력 경운기 10만 대를 추가 공급하라는 특별 지시를 내렸다. 이 같은 확대 보급으로 동력 경운기는 영농의 주축 기종으로 부상했고 농업 기계화의 상징물로 대접받기 시작했다. </P><P> </P><P>1977년부터 1982년까지 시행된 제2차 농업 기계화 5개년계획의 핵심은 ‘벼농사의 일관 기계화 추진’이었다. 1982년부터 1986년까지 시행된 3차 농업 기계화 5개년계획의 목표는 1987년까지 평야는 100% 기계화, 산간은 50% 기계화로 정해졌다. 원예와 축산의 기계화를 촉진하기 위해 관리기와 과수용 방제기, 예초기 등이 공급됐다. </P><P> </P><P>1990년대 농업 기계화사업의 핵심은 김영삼 정부 시절부터 시작된 ‘농기계 반값 공급 계획’이다. 일반 농가가 구입하는 농기계에 대해 200만 원 한도 내에서 구입비의 50%를 정부가 지원하는 제도였다. 이 제도가 끝난 1997년 벼농사의 기계화율은 1992년 88%에서 98%로 급상승해 ‘벼농사의 일관 기계화’의 꿈이 완성되기에 이르렀다. </P><P> </P><P>2000년대 한국 농기계산업의 화두는 환경친화, 무인·원격조정 첨단 농기계의 구현이다. 한국의 기계화 벼농사를 상징했던 자탈형 콤바인은 여전히 건재하지만 향후의 농업은 철저한 환경친화, 정보기술(IT)과의 접목을 통한 노동력의 ‘절대적 절감’을 지향하고 있다. </P><P> </P><P>농촌진흥청 농업공학연구소가 한 민간업체와 4년여에 걸쳐 공동 개발해 올해 선보인 원격조정 가능 인공지능형 트랙터가 그 좋은 예다. IT를 접목한 무인농 기계는 10년 이내에 영농환경을 이끌어갈 핵심 기반기술이 될 것으로 보인다. </P><P> </P><P>국내 한 농기계 생산업체가 최근 개발한 ‘친환경 멀칭(mulching) 이앙기’는 농약 사용을 근절할 수 있는 획기적 농기계로 주목받고 있다. 멀칭 이앙기란 생분해성 멀칭 종이를 깔면서 이앙하는 기계다. 재생지 멀칭으로 햇빛을 차단해 잡초의 생육을 억제하므로 제초제 등 농약이 필요없다. 멀칭 종이는 60일이 지나면 물과 미생물에 의해 분해돼 없어진다. </P><P> </P><P>호미와 쟁기를 사용한 ‘원시농업’에서 벼농사 기계화율 100%를 달성한 한국 농업은 중대한 갈림길에 서 있다. 쌀을 포함한 거의 모든 농산물의 수입 개방이 이미 예정돼 있다. 최고급 품질의 농산물을 저렴한 원가로 생산할 수는 없을까? 차세대 농업은 첨단 농기계에 의한 첨단 농법이 책임질 수밖에 없다. </P><P> </P><P align=right>- 2005. 5. 30. 국정브리핑 - <BR></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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